스토리1

[스크랩] 째즈 역사....!!

NLL함장 2009. 5. 3. 15:33

 연도

History

재즈의 기원
(1930년대 이전)


 재즈의 발생지는 뉴올리언즈라고 한다. 미시피시가의 하구의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즈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흥등가가 있었으며 그곳에 클럽 등지에서는 랙타임 피아노를 중심으로 하는 그룸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여기에 브라스 밴드가 가끔거리 한복판을 행진하곤 했는데 그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민요를 독창적인 편곡으로 즉흥적인 요소까지 섞어가며 연주했다. 이것이 1910년대에 재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에는 재즈의 중심이 뉴올리언즈에서 바람의 도시인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 흑인가로 옮겨졌다. 이시대의 주인공은 뉴올리언즈 출신의 '킹 올리버'와 그의 제자인 '루이 암스트롱' 이었다 특히 루이 암스트롱이 20년대 보여 주었던 연주기법은 혁명적인 것으로 그 자유분방한 에드립 플레이와 편곡이 낳은 허구적인 로맨티시즘은 소박한 뉴올리언즈 재즈를 근본에서 부터는 작용을 했다.

루이 암스트롱이 화려하게 활동하고 있던 그 무렵, 또 한사람의 위대한 재즈 뮤지션 '듀크 엘링턴'이 워싱턴에서부터 뉴욕에 등장했다. 20세기 초부터 북부의 할렘에 흑인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뉴욕에는 점차로 흑인가가 형성되면서 랙타임의 한 종류인 독특한 스트라이드 피아노가 유행했는데 1920년대의 호황기에 할렘에 있는 백인 관광객 전용의 화려한 '코튼 클럽'에서 일약 이름을 날린 사람이 바로 듀크 엘링턴이다. 20 세기 가장 뛰어난 작곡가는 누구일까?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은 음악 전문가들은 이고로 스트리빈스키, 벨라 바르토크 그리고 듀크엘링턴을 꼽는데 주저하 지 않는다.연주를 중시하는 재즈음악에서 작곡과 편곡으로 뛰어난 사운드를 창시한 듀크 엘링턴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그는 대중의 댄스 음악이나 거리의 음악에 불과했던 재즈를 승화시킨 커다란 업적을 세웠다.

재즈의 역사는 그 탄생 시점부터 상당히 잘 기록,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축음기 덕택이다. 구체적으로는 1920년대 이후이다.그때가 되면 음반으로 기록 되어 전해내려오는 증거물이 많아, 후대 사람들이 재즈 역사를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 추적해 낼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재즈는 아주 인기있는 음악이었고, 미국 남부 흑인 노동자들의 민속 음악이었다.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이 음악은 미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유럽에까지도 전파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즈는 전세계에 알려졌고, 1960년대부터는 음악의 형태로서 뿐 아니라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되었다. 레그타임(1890년대 말), 뉴올리언지와 딕시랜드(1910년대), 시카고(1920년대) , 캔사스 시티(1930년대)등으로 1930년대 이전의 재즈를 나누어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전에 활동했던 뮤지션으로는 '유비 블레이크', '자니 던', '스콧 조플린', '킹 올리버','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등이 있다.

스윙과 빅밴드
(1930년대)
 


 1930년대 이후, 재즈맨들은 빅 밴드 활동에 생계를 의존하는 비율이 점점 더 높아갔다. 연주자의 입장에서, 그 빅 밴드란 솔로 연주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박탈하는 양식일 뿐이다. 백인 악단들은 그러한 기형적인 재즈를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swing 재즈가 도래했다.

그때, 듀크엘링턴이라는 거장이 출현하여 그러한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엘링턴 악단이 출발 당시 보여주엇던 그 넘치는 활력은 이내 '정글밴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글 밴드는 재즈 악단의 발전사에서 중요한 계기로 평가받고 있다. 즉, 악단의 뛰어난 솔로이스트들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평쳐 보일 수 있는 공간을 한 번씩은 부여하는 형식이 거기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다. 이것은 재즈사를 통틀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재즈가 뉴올리언스 재즈식의 '집단즉흥'으로부터 진일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는 재즈가 뉴욕과 시카고의 양대 진영으로 나위어 대립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대립상은 캔자스시티에서 카운트 베이시악단이 탄생함에 따라 종식되었다. 향후 재즈에 커다란 영향을 미티게 될 태도상의 전환 또한 바로 그 시기에 이루어졌다. 즉, 그 악단의 등장으로 테너 색스폰의 레스터영과 트럼본의 디키 웰스라는 뛰어난 두 뮤지션이 빛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재즈 음악을 앞 시대에서처럼 외향적이고 명랑한 성경으로 되돌려 놓앗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19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재즈는 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제 막 태동하던 음반 산업과 재즈, 이 둘 사이에 강고한 연대가 형성된 것이다.그러한 면화의 물결에 적극 동참하여 소편성 그룸 공연 활동을 해나간 주요 인물들로는 피아노의 테디 윌슨, 가수 빌리 홀리데이, 클라리넷의 베니 굿맨을 꼽을 수 있다.

또 음악의 생산-소비 형태가 그 같은 구조적 변혁을 맞고 있었음과 아울러 재즈와 일반 유행 음악 사이의 벽이 성공적으로 허물어지기도 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패츠 윌러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암운이 드리워지고 잇던 그 당시,역으로 재즈는 번성 일로를 구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는 카운트 베이시, 베니 카터, 로이 엘드리지, 베니 굿맨, 스테판 그라펠리,라이오넬 햄프턴, 빌리 홀리데이, 레스터 영, 아트 테이텀, 벤 웹스터 등이 있다.

비밥
(1940년대)
 


1940년대의 재즈라고 하면 비밥(Be Bop)이 머리에 떠오른다.스윙 뮤직은 댄스음악으로서 대중속으로 깊게 파고든 음악이었으나 음악적으로는 앙상블의 중싱이었기 때문에 즉흥연주를 잘하는 실력있는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불만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정열을 배출시켜 준 것이 업소에서 일을 끝내고 나서 행해진 자신들의 가량ㅇ르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젬 세션이었다

젬 세션은 캔사스시티의 흑인 재즈맨들 사이에서 성행했다. 그들의 대부분이 뉴욕으로 진출함에 따라 그 운동은 더더욱 번져갔다. 캔사스 출신의 대 스타로 카운트 베이시가 잇는데 일반적으로 '스윙의 왕' 이라고 하면 베니 굿맨을 생각하지만 재즈 뮤지션들은 이 타이틀은 카운트 베이시에게 가야 한다고 주장할만큼 스윙을 극히 자연스럽게 연주했던 인물이다.

1940년대에 새음악 어법을 모샐하는 진취적 열기의 재즈 세션들이 잇따라 벌어졌는데, 그 중심지는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와 '먼로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클럽이었다.

기존의 여러 음악 법칙들의 타당성 여부가 검증되었고, 많은 경우 새로운 법칙으로 대체되어 나갔다. 그 반역의 주도자들, 즉 찰리 파커, 찰리 크리스천, 디지 길레스피는 모드 바로 앞 세대의 재즈인 빅 밴드를 체험한 사람들이지만, 이제 그 질곡에서 벗어나 보다 큰 자유로 향한 모험을 떠난 것이다. 그 탐색의 결과, 참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생성되었다. 스윙 재즈 시기의 감미로운 선율 대신 기본음 조직이 새롭게 구축된 음악, 근본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기존의 선율을 토대로 자신의 개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잇는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혁명적 재즈였다.

비밥이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비밥 또는 밥으로 알려졌다. 그 이름은 새 음악에 적합한 명칭을 찾던 중, 그 음악 특유의 톡톡 튀는 느낌을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의성어가 바로 그것이라는데는 생각이 미쳐 나온 것이다.나웅에 그 말은 축약되어 그냥 밥 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음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 실로 천차만별의 반응이 일어났다.

밥의 위력은 단지 생겨난 당대에만 그치니 않았다. 밥은 멀지 않아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음악적 파생물들을여럿 거느리게 된다. 먼저, 디지 길레스퍼는 쿠바의 작열하는 리듬을 비밥에 이식한 큐밥에 도달했다. 파커는 후기로 갈수록 클래식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현악 반주를 도입하게 된다. 비밥의 산실이었던 뉴욕의 민턴스 클럽은 비밥의 개조 실험실로서의 의무를 계속 충실히 수행했다. 1940년대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이 되자, 넒은 뮤지션들은 비밥이 이뤄놓은 성과들을 기반으로 하여 다음세대 재즈의 어법을 구체적으로 탐색해 나갔다.

쿨 재즈
(1950년대)
 


쿨이란 말은 음악의 이름치고는 별로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이름은 일련의 부정적 이미지들을 곧바로 연상히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즉 '무기력한', '병적인', '쇠잔해진' 따위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음악으로서의 쿨 재즈는 전혀 그렇지 않다. 먼저, 그때 그때 음악의 유행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은 뮤지션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최대가치는 재즈 고유의 영역인 즉흥연주에 있었다. 주관적인 감정은 되도록 버리고 재즈 고유의 순수 미학을 천착해 갈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재즈의 즉흥성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재즈의 객관주의자요, 재즈의 미학주의자 이다.

반대로, 이 객관주의자들에 반기를 들고 나온 일파가 스탄 게츠, 제리 멀리건, 리 코니츠 등의 선구적 색스폰 주자들이다. 그들은 기법적 요소보다는 자기 내면을 어떻게 하면 보다 정감있게 전달할 것인가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재즈의 인간주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 재즈 운동의 중심임물로 먼저 부상한 사람이 드러머 아트 블래키였다. 이어 그 진영을 일련의 신세대 주자들이 메웠다. 그들은 소니 롤린스, 재키 맥클린, 자니 그라핀 등의 색스폰 주자들과 클리포드 브라운, 리 모건 등 트럼펫 주자들이다. 또 재즈의 우상 파괴자 찰스 밍거스의 강력한 베이스가 그 중심점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음악은 기존의 속박과 결별한 사람들 사이의 영가라고 할 만큼 그 어떤 창조적 영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정한 변혁의 기운은 그렇게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 즈음, 밥을 창조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마일즈 데이비스가 공백을 깨고 나와서 자시 고유의 어법 탐색에 나섰다. 그는 색스폰 주자 존 콜트레인과 힘을 합쳐 선법 시대를 열었다. 그에 따라 종래의 화성 진행 지상주의가 일거에 혁파 되었다.그들의 선법이 코드 개면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새 기법, 또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재즈의 주류로 올라서게 되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실로 혁명적인 음악적 도구를 개발한 것이다.

 하드 밥과 보사노바
(1960년대)


1960년대 재즈의 주류는 하드 밥 이다. 그러나 하드 밥만이 전부였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드 밥 재즈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찬찬히 돌이켜봤을 때, 1960년대 초에 일어난 움 직임들 가운데 재즈적으로 가장 뜻깊었던 것은 '프리 뮤직 운동' 이다. 프리 뮤직은 태동기의 비밥과 흔이 비교된다. 무엇보다 기존의 것에 대한 거부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 둘은 흡사하 다. 그러나 프리 뮤직이 태동기의 밥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배척받았다. 프리 뮤직은 급진적인 실로 급진적인 재즈였기 때문이다. 프리뮤직 진영은 지금까지의 음악과의 완전결별을 소리높이 외치고 나왔다. 그것은 그냥 새롭다는 차원이 아니었다.프리뮤직의 이상은 야성적인 화성체계에 있었다.

1960년대는 실질적 의미에서 빅 밴드는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앞세데 빅 밴드의 거장 듀크 엘링턴과 카운트 베이시의 명성은 1950년대 말까지도 건재했는데, 특히 엘링턴의 경우에는 끊이지 않고 훌륭한곡들을 발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엘링턴 밴드를 제외한 다른 빅 밴드들은 자신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회고하는 음악 쪽으로만 파고 드는 데 그쳤다. 빅 밴드 재즈는 그야말로 빈사상태였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언제나 재즈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현재의 재즈가 맞닥뜨린 문제점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하고, 또 앞으로 나아갈 바를 시대를 앞서 제시해 온 인물이 바로 그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 그는 5중주단을 이끌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는 가운데 1960년대는 저물어 갔고, 그는 자기 재평가 작업을 냉철하게 착수했다. 재즈가 일반 대중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그는 우선 자신의 음악부터 쉽게 만들어 나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외면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록 음악의 전자적 어법을어떻게 수용해 내느냐의 문제로 집약되었다.그는 선구자적 정신으로 그 일에 임했다. 그리고는 문자 그대로 단 한 장의 음반으로 재즈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 역사적 음반이 'In A Silent Way'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록 음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대부분의 음악이 록을 향해 치닫던 그 마당에서, 미국의 재즈는 퇴화 일로의 지경에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즉 밥 재즈의 자유가 록 음악의 고정적 규칙적인 박자로 대체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음악의 현실적 양태는 결국 록 음악이었다. 음악의 주도권이 멜로디 악기에서 베이스와 드럼으로 넘어간 것이다.

 프리재즈와 퓨전재즈 (1970년대)


 1960년대로 옮기면서 재즈계는 아주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캄보에서 탈퇴한 존 콜트레인과 1959년 뉴욕에 진출한 오네트 콜맨에 의해 재즈는 새로운 세계에 돌입한 것이다.

마일즈 데이비스와 편곡자인 조지 러셀 등이 중심이 되어 종래의 코드 진행에 의한 즉흥연주에서부터 스케일 범위내에서 구사한 정통적인 재즈에서 순수한 영감에 의한 전위적인 프리 재즈가 선보였다.

이들의 음악이 재즈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신랄한 비판과 격찬을 받으면서도 하나의 사조로서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파급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충격적이고 이질적이었지만 곧 하나의 전통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음악적 특색인 즉흥성과 화음외에 또 하나 커다란 것은 전통적인 재즈 밴드가 한사람의 대가를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되고 이글에 하나가되어 음악활동을 한 것에 비해 프리 재즈는 각 파트를 담당하는 연주자들이 제각기 독립성을 갖고 동등한 비중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의 앙상블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들 전위주자들 가운데 유럽의 민족음악을 프리 재즈의 세계에 도입한 것은 존 콜트레인, 세실 테일러로 그들은 학구적인 실험보다는 보다 직접적인 고유의 아이디어를 창출해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는데 그것이 곧 유럽으로 전파돼 자유롭고 격한 면으로 변질시켰다. 인종적이며 감성적인 프리 재즈가 지닌 결코 인위적이 아닌 필링이 유럽인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60년대말 절규의 재즈가 쇠퇴해질 무렵 지미 핸드릭스를 들으면서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69년 에 충격적인 걸작 'Bitches Blew'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곡 리듬과 전기 기타, 그리고 전기 키보드를 사용함으로써 비록 단기적인긴 하지만 재즈의 울타리를 넘어서 록과의 접합을 시도하면서 생긴 말이 재즈 록 퓨전으로 우리는 이것을 통상 퓨전 재즈라고 부르고 있다.

40년대에 쿨 재즈를 창조한 마일즈 데이비스, 그는 지속적으로 재즈의 표현법, 테크닉은 물론 생각까지 바꾼 퓨전 재즈까지의 변천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메인스트림 재즈 (1980년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즈는 한가지 스타일로 규정되지 않는다. 스윙 시대니 밥 시대니 하는 식의 시대 구분법이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재즈는 끊임없이 분화될 뿐 아니라, 초월에 초월을 거듭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의 재즈는 통합적이고 절충적으로 발전하는 경로를 택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이 처럼 다채로운 스타일들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공존했던 현상은 이전에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어느 특정 스타일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는 일 자체가 바로 1980년대 재즈 스타일 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진정한 자유에 점차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공감하게 된다. 이때 자유란 물론 예술적 자유를 뜻한다. 여러 음악 재료들 중 어느 것을 뽑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의 자유가 그것이다.

그 선택대상의 범위는 실로 광범위하다. 한 가지 빠르기만을 탈피한 자쥬 박자와 규칙적인 전통 박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자유롭게 열린 형식과 32마디라는 정통재즈 형식 사이 어디쯤에, 또는 장조도 단조도 아닌 자유 조성과 전래의 장단조 사이 어디쯤에,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월드 뮤직, 비밥, 극소수의 음악, 록, 뉴올리언즈 재즈, 트래시 록, 탱고, 힙합, 이 사이 어딘가에도 존재한다.

재즈의 역사에서 이 시기와 같이 여러 스타일이 한꺼번에 출연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이 시기에 많은 재즈 뮤지션들은 여러 재즈 스타일을 습득했고 그들 음악에 이 모두를 포함시켰던 것이다. 모든 스타일을 한데 묶고 특정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80년대의 스타일'이 된 것이다. 아울러 맥코이 타이너, 칙 코리아, 키스 쟈렛 등 여러 뮤지션들이 전통적인 리듬 색션을 사용하여 재즈를 주류 또는 전통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이후 나타난 윈튼 마살리스는 듀크 엘링턴과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재즈의 거인들로부터 자신의 음악을 끌어내어 젊은 뮤지션 중 이 흐름을 이끄는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1980년대의 재즈 메시지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무엇이든 좋다' 라고 할 수 있다.

 컨템포러리 재즈 (1990년대)


1990년대 재즈는 팝 음악으로부터 영향받은 새로운 컨템포러리 크로스 오버 스타일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일찍이 재즈가 록의 융합이 휴전재즈라는 장르를 잉태시키더니 이제 한술 더떠 아무 것이나 수용하는 크로스 오버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음악은 즉흥적인 솔로의 중요성 보다는 멜로디에 대한 강조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데 이로 인해 스파이로 자이라, 케니 G, 퀸시 존스 등이 히트 챠트의 정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재즈 내부에서도 새로운 물결에 대한 수용자세로 브랜포드 마샬리스 같은 정통 재즈 뮤지션이 재즈에다 근자에 유행하는 랩, 힙합, 레게를 뒤섞은 음악을 선보이는등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있다. 그런가 하면 80년대 중반이후 유로 댄스뮤직의 주류인 하우스 뮤직에서 식상한데서 태동한 에시드재즈 1990년부터 국제적인 댄스음악 유행의 부산물로 댄스 클럽을 배경으로 시작해 에시드 하우스에서 나온 것으로 오늘에 이르러 새로운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데 한마디로 댄스뮤직과 재즈를 접목시킨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재즈라기 보다는 댄스뮤직의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만남은 재즈에서 뿐만 아니라 70년대 이후 모든 음악에서 나타난 독특한 크로스오버 뮤직화의 한 측면이라고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재즈는 가장 격심하게 흔들린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재즈의 다양성이야말로 뉴올리언즈 시대 이래 재즈가 보여준 창의적인 즉흥음악의 정신 그것이라고 할 수 있고 크로스오버 뮤직 시대에 있어 자못 재즈가 찾아나갈 방법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재즈는 모든 음악으로부터 그 방향을 모색해 왔고 클럽이나 콘서트 홀, 라디오, 음반 등을 통해 광범위한 그리고 진지한 팬들을 확보한 음악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백년 후면 재즈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며, 흥미 있는 음악으로 발전할 것이다.
출처 : 째즈 역사....!!
글쓴이 : 탱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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